어찌하여 백수가 가장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몇일전 그날의 기록을 남기려고 한다.
그날의 감정이 이미 휘발되었지만, 그래도 오늘이라도..
사표내기 딱 좋은날
2023. 9.20 수요일.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가방도 무겁고, 비가 뭐 그렇게 많이 오는 것 같지 않아서 우산을 챙길까 말까 하다가 작은 우산을 가방에 넣었다. 월드컵이 열리던 해 2002.1.2 에 입사했다. 아직 대학 졸업을 하지 않았던 때다. 그리고, 2년 조금 넘게 첫 회사를 다니다가 지금의 회사로 이직했다. 그 곳에서 결혼을 했고, 아주~~~ 긴시간의 터널을 지나 임신, 출산을 했다. 대한민국만세를 보며 하나도 둘도아닌 셋은 남의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내이야기였다. 그렇게 육아휴직, 복직 그리고 또 다시 육아휴직, 사실 마지막은 휴직이라고 썼지만, 모두가 자연스럽게 퇴직이라고 읽었다.
그리고 1주전 이사님께 카톡이 왔다. 통화를 해보니, HR에서 나의 향후 계획을 묻는 연락을 받으셨다고 했다. 대충 가을의 어느날이라고 생각했지만, 명확하게 날짜를 기억하지는 않았기에, 전화를 끊고 나서 아.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하고 시간이 참 빨리도 가는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난, 이사님도 뵙고, HR에 서류작성등 절차도 진행할 겸 회사로 갔다.
지하철에 내려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통화를 하다가 지하철 정거장도 한번 잘못 내렸고, 게다가 버스 출구도 잘못 나갔다. 설상가상 비는 무지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상황이 이랬지만, 난 꽤 덤덤했다. 사표내기 좋은 날이라고 되내어봤다.
우리 회사는 몇개의 건물에 나뉘어져있다. 조직개편으로 휴직전 나의 보스는 다른 조직으로 옮겨가셨다. 그래서 X-보스가 계신 사옥으로 향했다. 우린 늘 출장이 많았던 터라 아침에 출발하며 보스의 위치를 여쭸다. 다행히 서울에 계셨다. 하지만, 급하게 일정을 여쭌 상황이라, 점심까지 미팅과 일정이 꽉차여 있으셨다. 다시오면 되지만, 그래도 얼굴이라도 뵈는게 좋을 것 같아서 부랴부랴 사무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정말 운좋게도, 본사 원래 사옥으로 미팅 참석차 나오시는 보스를 만났다. 안부를 여쭙고 다시 함께 차를 타고 본사로 와서 HR로 향했다.
몇장의 서류
HR 담당에게 간단한 몇가지 안내를 받았고, 늘 싸인만 했던 사직원을 작성했다. 기분이 묘했다. 20년 넘는 나의 직장인으로서의 커리어를 종결짓는 서류는 생각보다 쓸 것이 없었다. 재직중에 작성했을 경우, 인수인계 내용등 조금 더 세세하고, 반납물품등으로 더 복잡했겠지만, 이미 나는 장기 휴직후에 작성하는 서류였던지라 섭섭하리만큼 간단했다.
11층 사무실로 향했다. 본사 사옥에 엘리베이터를 교체해서 그런지 꽤 오랫동안 익숙하게 다니던 곳인데 뭔가 좀 어색하고 낯설었다. 사무실은 그대로였지만, 익숙함 보다는 어색했다. 오랫만에 뵙는 부장님과 인사도 나누고, 회의중이신 이사님을 기다리려던 차에 상무님 방이 열렸고, 익숙한 얼굴들이 쏟아져나왔다. 점심시간이라 뉴보스와 짦게 이야기를 나누고, 이사님께 HR에서 작성한 사직원을 드렸다. (결재판도 없이, 내밀었다. 이전같으면 상상도 못할일이었지만.. 이사님 죄송해요) 그리고 함께 급히 식당으로 향했다.
역시는 역시
이사님, 그리고 회사의 친한 베프 언니와 황급히 식당으로 향했다. 메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빨리 앉아서 먹을 수 있는 그런 곳이면 충분했다. 한 15분쯤 기다려서 들어갔다. 기다리는 동안 메뉴를 바라보는 내게 언니는 말했다. 고를 필요 없어, 들어가서 먹을 수 있는거 먹는거야. 라고 ㅋㅋㅋ
순간, 아 맞다. 내가 잊고 있었구나..
빠른 식사를 위해 메뉴 통일, 순두부 찌게 그리고 먹기 시작했다. 늦게 나왔고, 기다렸기에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들의 속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빠른 식사를 했다. 뭐 내게도 크게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안가 이사님이 전화를 받으셨다. 상무님 호출.
그랬다. 점심시간이고 뭐고, 늦게 나왔건 말건, 이제 밥먹으러 앉았건 말건. 모든 것은 일에 포커스 되어있었다. 이사님께 저희는 괜찮으니 식사하시고 먼저 올라가시라고 말씀드렸다. 잊고 있었지만, 나의 뇌와 감정은 그 상황을 자연스럽게 이해했다. 그냥 그저 오랫만에 만난 이사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을 뿐이다.
언니와 나도 이사님이 자리를 뜨신 후 얼마 되지 않아 식사를 마무리하고 나와 바로 앞 카페로 향했고, 얼마 되지 않아 언니도 사무실로 복귀했다.
새로운 시작
사표는 끝이 맞지만, 난 휴직기간동안 나름의 시작을 고민하고 준비해가고 있었기 때문인지, 이제 진짜 시작이라는 의미를 더했다. 사표라는 현실 앞에 난 아무렇지 않았다 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아쉬움에 펑펑 눈물이 날 줄 알았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과 시간들이 너무 정신없어서 였는지, 눈물을 애써 참은 순간도 없었고, 감정이 깊게깊게 저 땅아래 지하 5층쯤까지도 가지 않았다. 오히려 방실방실 즐거운 듯 보이는 내게 그만 웃으라는 말을 들었다.
물론 불확실한 미래에 걱정, 불안함, 두려움이 많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보다, 새롭게 시작해서 나아가는 과정에서의 설렘에 더 집중해서 그 것을 결과로 보이고 싶다. 물론 쉽지 앟겠지만..
나의 직장인 라이프를 함께 했던 모든 이에게 감사한다. 그들이 있어서 버티고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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